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이어지고, 다시 자신을 거쳐 아들에게 이어진 가업이 올해로 108년이 되었다. 흔들리지 않았던 진심은 한 세기를 지나며 전통이 되고 문화가 되었다. 정직하게 무쇠 가마솥을 만들어 온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45호 주물장 김종훈(金鐘熏)의 이야기다.
주물장 김종훈이 완성된 무쇠 가마솥을 살펴보고 있다.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쇳물로 제작되는 그의 무쇠솥은 전통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처음 만난 사람의 나이가 궁금한 이유는 그 삶을 가늠하고 싶어서다.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어리다, 젊다, 늙다 등의 피상적 형용사로 대상을 평가하려는 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잇고 기워 일상을 꾸린 개인의 역사가 듣고 싶어서다. 올해로 여든 아홉 살인 김종훈 장인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건 그런 맥락의 일이다.
“1930년 생이니 오래 살았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태평양전쟁이 일어났고 2차세계대전, 해방도 겪었지. 한국전쟁 땐 총만 안 들었지 참전도 했어요. 중공군이 가세해서 우리 군이 후퇴할 적에 내 나이가 열여덟이었는데, 그때 18세 이상 남자들은 모조리 제2국민병으로 편입됐거든. 엄동설한에 걸어서 부산까지 내려가는데 먹을 게 없으니까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얻어 먹고 그랬어요.”
사방이 전쟁터였는데 용케 살아남았다. 운이 좋아 공부도 놓치지 않았다. 꿈꿨던 의대 입학은 비록 포기했지만, 수원에 있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뭐든 해 보고 싶은 게 많았던 꿈 많은 청춘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전쟁 중에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돼 가업인 주물공장이 멈춰설 판이 되자 어쩔 수 없이 책 대신 철을 쥐어야 했다. 가끔 물 심부름이나 하던 손으로 뜨거운 쇳물을 부었다. 그때가 졸업을 1년 반 남겨 둔 1953년, 휴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복학을 바랐으나 학교로 돌아가지 못한 채 그는 그렇게 무쇠솥을 만드는 주물장이가 되었다.
꿈을 뒤로하고 쇳물을 녹이다
1950년대만 해도 집집마다 부엌에 솥을 걸고 살았다. 살림이 넉넉지 못한 집도 밥솥, 물솥, 국솥이 따로 있었다. 소를 키우는 집이면 소죽 끓이는 솥도 형편에 따라 따로 장만하던 시절이었다. 솥은 어디서나 환영받는 필수품이라 만들기만 하면 파는 걱정은 없었다. 마차에 싣고 다니면서 가까운 시장에 내다 팔면 커다란 무쇠 가마솥 하나에 쌀 두 가마니와 무명 두 필을 얹어 받았다. 현금은 아니었으나 섭섭지 않은 값이었다. 농사를 짓지 않아도 광에 쌀이 그득했고 보릿고개조차 모르고 살았으니, 가족을 부양하기에 꽤 좋은 돈벌이였다. 그래서였을까. 김종훈은 가업을 이으라는 아버지의 말에 저항하지 않았다.
“안성에 터를 잡은 할아버지가 유기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장터 한 귀퉁이에서 쇠를 녹여 가마솥 때우는 일을 하셨대요. 이후엔 가마솥 수리 가게를 열었고, 그러다가 1910년 일본인이 하던 주물공장을 사들여 ‘안성주물’이라 이름 붙이면서 본격적으로 가업이 시작됐어요. 300평 대지에 8칸짜리 공장에서 가족 예닐곱 명이 꾸려 가는 가내수공업이서 한 달에 잘해야 솥 예닐곱 개를 만들었죠. 1930년에 아버님이 물려받으셨는데, 직공들 서너 명이 함께하긴 했어도 규모는 여전히 전과 비슷했죠. 내가 맡고 나서야 대혁신을 이뤘어요. 작업 구조를 바꿨거든요.”
재래식 부뚜막에 걸어 놓고 쓰던 가마솥을 축소해 만든 작은 가마솥은 밥을 하거나 찌개를 끓이는 용도로 쓰인다. 200 × 200 × 120 ㎜. ⓒ서헌강(Seo Heun-kang 徐憲康)
예전에는 쇳물을 녹일 때 풍로를 발로 밟아 풍구에 바람을 넣던 일을 발동기를 들여 놓아 생산량을 늘렸다. 휴전 후 후생 사업에 쓰이던 군부대 트럭을 사들여 마차 대신 사용했다. 그러자 고작해야 근거리 시장이었던 판로가 이천, 용인, 수원을 비롯해 멀리는 청주와 제천으로까지 확장됐다. 동력과 유통 방법을 바꾸니 비로소 규모를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대를 이어 물려받은 제작 방식만은 바꾸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틀과 틀 사이에 쇳물을 붓는 전통 주물 방식을 고수한다.
“용광로에 나무와 탄을 집어넣고 불이 붙으면 풍구로 바람을 넣은 뒤 선철과 코크스, 석회석을 넣습니다. 이렇게 하면 용광로 온도가 2,100℃까지 올라가는데, 단단한 무쇠 가마솥을 만들려면 그 온도를 지켜 순수한 쇳물을 얻는 게 중요해요. 그렇게 만든 쇳물을 틀에 부어요. 조금만 모자라도 주물에 구멍이 뚫리고, 미세한 온도 차이에도 쇳물이 튀니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일이에요.”
신기술을 받아들여 공장을 현대화하는 동안에도 그는 언젠가 학교로 돌아가리라 내심 생각했었다.
그런데도 수십 킬로그램의 벌건 쇳물을 여럿이 들고 호흡을 맞춰 한 번에 틀에 붓는 그 순간이 좋았다. 쇳물을 붓기 전 거푸집과 형틀, 중자, 주물사 등 챙길 게 수십 가지여도 전혀 귀찮지 않았다. 또 불꽃 튀는 현장이 두렵지도 않았다. 오로지 누구도 깨뜨리지 못할 단단한 솥 하나를 빚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용광로와 형틀을 수리하는 과정도 게을리할 수 없었다.
경영난 무릅쓰고 4대를 이어 온 가업
김종훈의 시간을 응축한 쇠는 팽창하고 분열하는 불과 만나 옹골찬 솥이 되었다. 간혹 차가운 솥을 매만지면 가슴이 먹먹했다. 무쇠에 담긴 시간이 말을 거는 까닭이었다. 때론 ‘가지 않은 길’과 ‘가야만 하는 길’이 떠올라 마음이 식곤 했다. 그럴 때마다 뜨겁고 무거운 쇳물이 그를 데워 가야만 하는 길로 다시 몰았다. 그렇게 솥 만드는 과정이 손에 익었을 무렵, 그는‘평생을 무쇠솥과 함께 살겠구나’ 생각했다.
“착각이었어요. 사업이 대개 그렇듯 기술이 발달하면서 주물도 부침을 겪더란 말이지.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지고 가옥 개조 열풍이 불면서 넓은 부뚜막에 커다란 가마솥을 걸고 쓰던 부엌이 입식으로 바뀌기 시작했죠. 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한 까닭에 아궁이가 사라지고 연탄 보일러가 등장했어요. 그뿐인가. 1960년대에는 양은이 나왔고 1980년대엔 스테인리스가 등장했으니, 무겁고 간수하기 힘든 무쇠 가마솥은 사양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어요.”
편리한 세상이 오자 주물 시장이 저물었다. 없어서 못 쓰던 무쇠 가마솥이 고물상에 버려졌고, 부엌을 지키던 든든한 솥이 천덕꾸러기로 내몰리게 되자 전국 각지의 주물 공장이 문을 닫았다. 그렇게 급변하는 시대를 따라잡으려니 숨이 턱턱 막혔다. 그래도 멈출 순 없었다. 보일러를 주물 방식으로 만들거나 자동차 부품 같은 물건들을 만들어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1980년대 초반엔 가스레인지에서 사용할 수 있는 핵가족용 무쇠솥을 만들어 또 다른 돌파구로 삼았다. 차츰 안정기로 돌입할 즈음 다시 문제가 생겼다.
“잘못 받은 어음 때문에 1989년 첫 부도가 났지만 바로 회복했어요. 그런데 1994년엔 피하지 못하고 살던 집이며 공장까지 넘어갔지. 주물 보일러 기술로 중국까지 진출할 계획이었는데, 그 공장마저 빼앗기고, 이어서 IMF 시절이 닥치니 상황이 더 혹독했어요. 그런데도 포기가 안 되는 거예요.”
시련은 끊이지 않았다. 공장 임대료는 자꾸 올라가고, 남의집살이가 혹독했다. 둘째 아들이 함께 하자고 들어온 2004년엔 형틀은커녕 망치 하나, 삽 한 자루도 없었다. 말 그대로 맨땅에서 다시 안성주물을 세웠다. 이제 그에게 더 이상 ‘가지 않은 길’은 없었다.
수십 킬로그램의 벌건 쇳물을 여럿이 들고 호흡을 맞춰 한 번에 틀에 붓는 그 순간이 좋았다 … 불꽃 튀는 현장이 두렵지도 않았다. 오로지 누구도 깨뜨리지 못할 단단한 솥 하나를 빚는 게 중요했다.
김종훈 씨에게 안성주물의 경영을 이어받은 아들 김성태 전수자가 생산 직원들과 함께 가마솥의 거푸집을 형틀에서 벗겨내고 있다. 거푸집은 쇳물이 800℃ 정도로 식었을 때 분리해야 솥의 모양이 변하지 않는다. ⓒ서헌강
장이에서 장인까지 반백 년
아버지의 부탁으로 시작된 주물장이 반백 년 인생이 그를 장인으로 이끌었다. 2,100℃에서 녹은 순수한 쇳물처럼 그의 말간 열정이 도달한 목적지였다.
“우리가 100년 전통 주물 방식 그대로 무쇠 가마솥을 만든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주기 시작했어요. 2003년엔 ‘경기도 으뜸이’로 선정되더니, 2006년엔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됐어요. 어린 시절 일상이자 놀이이기도 했던 주물이 직업이 되고 이만한 명예를 얻기까지 50년이 흐른 셈이지.”
2006년엔 둘째 아들 김성태(金成泰)가 안성주물의 대표를 맡았고 4대 주인으로 인해 다시 변화가 시작되었다. 국물이 넘치지 않도록 뚜껑이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는 무쇠솥 특허를 받는가 하면, 커다란 전통식 가마솥에서 개량형 무쇠솥까지 다양한 주물 제품이 옛것의 가치를 찾는 사람들의 일상을 파고들었다.
가장 큰 변화는 온라인 판매를 시작한 것이다. 판매량이 눈에 띄게 늘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돈을 좇진 않았다. 그 이전에 대를 이어 온 가업의 자긍심과 명예를 단단히 품었다.
안성주물에서는 전통적 제작 방식에 현대적 디자인을 조화시켜 효용성을 높이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팔각팬냄비는 탕이나 구이 용도이며, 탕구이팬은 냄비와 팬으로 동시에 사용할 수 있다. 크기는 각각 240 × 220 × 65 ㎜, 240 × 240 × 45 ㎜. ⓒ한국문화재재단(Korea Cultural Heritage Foundation)
“아들이 운영하면서 시스템이 많이 달라졌어요.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우리 솥을 살 수 있게 됐죠. 바라는 게 있다면, 2009년에 전수자로 인정된 아들 외에 주물에 관심 있는 사람이 더 나타나 100년을 이어온 전통이 더욱 단단하게 이어졌으면 하는 것이지요.”
혼란과 성장의 현대사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림을 겪었지만 김종훈 주물장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 깨어 있으려고 노력했다. “무쇠 가마솥은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이니 나에게는 반려자나 마찬가지”라며 구순을 바라보는 그가 아이처럼 웃었다. 자신이 만든 무쇠솥처럼 투박하지만 순수한 마음이 그 웃음 속에 뭉근하게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