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메뉴 바로가기본문으로 바로가기

2016 SPRING

LIFE

AN ORDINARY DAY 반찬가게, 오래된 새 길과의 만남

밥 한 그릇에 반찬 서너 가지, 거기 국이나 찌개가 곁들여지면 한국인에게는 만족스러운 한끼 밥상이다. 그녀는 자기 집을 드나드는 손님들로 하여금 집 냉장고에 이미 들어 있는 몇 가지 남은 반찬에 요것, 조것을 더해 만족스러운 한 끼 밥상을 차려내도록 돕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9시 30분 서울 구기동에 사는 그녀는 집을 나선다. 가게는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다. 유리문이 환한 가게다. 먼저 길에 면한 창을 열고 노트북에 저장해둔 음악을 튼다. 공기 속에 하루치의 에너지가 담겨있다. 심호흡을 하며 청소를 한다.

소소한 행복
그녀는 반찬가게 주인이다. 63년생 박난이(Park Nan-yee 朴蘭伊). 가게 이름은 ‘소소한 반찬’. 몇 해 전부터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작고 하찮아 보이는 일상이 삶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속에서 기쁨을 발견하기로 가치관을 바꾸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을 가게 이름에 담았다.
요즘 그녀는 이전 어느 때보다 뿌듯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창가에 이쁜 그릇들을 늘어놓고 정성 들여 반찬을 만든다. 가게에 온 손님들은 반찬을 선택하거나 주문하며 그녀의 손맛을 칭찬한다. 몸은 훨씬 바빠졌지만 마음은 훨씬 행복해졌다.
장조림, 잡채, 모듬전은 미리 주문 받아 만들어준다. “재미있는 건 사위에게 잘 보이고 싶은 젊은 장모님들이 주문하는 경우죠. 사위 앞에 솜씨 자랑은 하고 싶은데 자신이 없을 때. 아니면 소소한 반찬을 맛본 사위나 딸이 또 해달라고 조를 때. 처음에 손수 만들었다고 말했기에 털어놓기는 싫고 그래서 계속 우리집에 주문해서 사가는 거지요”
이곳은 반찬 가게지만 치유 공간이기도 하다. 젊은 엄마들이 와서 아이 때문에 남편 때문에 속상한 얘기를 툭툭 털어놓는다. 다 겪어보고 지나온 일들이다. 정답이 훤히 보일 때가 많다. 별거 아니라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다독거리면서 우엉볶음이니 연근조림을 권해준다. 울화를 다스리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 데는 뿌리채소가 좋다는 걸 아니까. 재료를 느끼는 시간 박난이의 ‘소소한 반찬’에서는 하루 일고여덟 가지 반찬을 만들고 한두 가지의 국을 끓인다. 각종 젓갈과 된장, 청국장, 온갖 종류의 김치는 기본으로 갖추었다.
청소가 끝난 후 11시까지는 대개 재료를 다듬는 시간이다. 재료 다듬기는 거친 일이다.
양파와 당근과 파의 껍질을 벗기고 감자와 우엉과 무를 썰고 마늘과 생강을 까서 다지는 일이 한국 요리의 기본이다.

 

재료마다 다른 강도로 다듬고, 다른 방법으로 썰거나 다지거나 찧어야 한다. “뿌리채소와 잎채소를 만지면서, 흙을 털어내고 각각 다른 색과 모양과 결을 느끼면서 기쁨을 느끼지 않으면 반찬가게를 유지할 수 없어요.” 재료 손질만 잘 해두면 다음 일은 한결 쉬워진다. 김치를 담그는 월요일과 수요일에 거들어주는 이가 한나절 출근하는 것 말고는 그녀는 모든 일을 혼자 한다. 혼자 감자를 깎을 때 그녀는 충분히 행복하다.
“직원을 쓰면 아무래도 반찬을 많이 만들게 돼요. 많이 만들면 팔 걱정을 해야 하니까 마음이 편안하지 않아요. 적게 만들어 내 반찬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팔려고요. 음식을 만들어서 나눠먹는 게 예전부터 제일 큰 보시라고 했대요. 큰오빠가 스님이에요. 부처님 앞에서 절을 올리고 불경을 독송하는 것도 기도지만 좋은 음식을 만들어 여러 사람과 나눠먹는 것도 기도라고 얘기하더라고요”
조그만 반찬가게가 늘 평안한 수행 공간이기만 할까? “여행도 외출도 없이 가게에 묶여 지내는 게 와락 힘들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가게 문 열고 첫 한 달은 반찬을 만들면서 이유 없이 자꾸만 눈물이 흐르데요.”

“뿌리채소와 잎채소를 만지면서, 흙을 털어내고 각각 다른 색과 모양과 결을 느끼면서 기쁨을 느끼지 않으면 반찬가게를 유지할 수 없어요.”

계획보다는 감각으로
메뉴는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전날 배달하는 아저씨가 가져온 재료의 신선도에 따라 그날그날 정해진다. 미리 계획을 세우지 않고 감각에 의존한다. 그게 더 맛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재료 손질이 끝나면 요리를 시작한다. 볶고 무치고 조리고 굽는다. 오늘 반찬은 모두 8가지다. 취나물 무침, 콩나물과 꼬시레기라고 부르는 해초 무침, 물미역 초무침, 역시 겨울이 제철인 매생이전, 봄동나물 겉절이, 굴소스를 넣은 중국식 가지볶음, 오리고기 훈제, 카레가루를 뿌려 굽고 레몬즙을 바른 고등어 구이! 거기다 한우를 넣고 고사리 숙주나물을 듬뿍 넣은 육개장이 있다. 이 말고 명란젓갈, 낙지젓갈 같은 젓갈 종류와 멸치볶음, 오징어채 볶음, 장조림처럼 오늘 다 팔지 않아도 좋은 반찬들은 따로 냉장고에 넣어뒀다. 그날 만든 반찬은 냉장고에 넣지 않는다. 한여름 말고는 일부러 차갑게 식혀서 먹는 냉채 같은 것 아니면 대부분의 반찬은 테이블 위의 넙적한 접시에 올려 뚜껑을 덮어두고 판다.
화학조미료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멸치 다시마 무 육수를 밑국물로 쓰고 볶은 깨나 들깨가루를 아끼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가 만드는 반찬은 짜지 않고 맛이 깊다. 가격은 대개 한 팩에 5천 원씩. 시장보다는 조금 비싸고 백화점보다는 조금 싸다. 백화점과 한 팩의 가격은 같지만 양을 좀더 많이 담는다.

우연히 만난 요리선생
그렇게 조리를 끝내는 시간이 2시쯤. 늦은 점심을 먹고 한숨 돌리는 시간이다. 이때 느긋하게 쉰다. 요리책을 보며 새로운 메뉴를 구상하기도 한다. 그녀는 원래 요리에 소질이 있었다. 음식을 만들어 먹이는 게 좋았다. 여러 사람이 먹을 상을 차리는 게 겁나지도 않았다.
젊어서 그녀는 카피라이터로 일했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큰 광고회사의 직원이었다. 나이 들어 파트타임으로 근무 조건을 바꾸어 일하다 보니 일이 점점 지지부진해졌다. 이름을 걸고 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돈도 벌고 기쁨도 얻는 일이 뭘까를 고민했다. 주변에선 솜씨가 좋으니 식당을 해볼 것을 권했다. 바야흐로 쉐프의 시대였다. 관심이 당겼으나 막막했다. “우연히 인사동에서 특별한 요리선생을 만났어요. 삶에는 우연이 없나 봐요. 깻잎 1킬로에 들기름을 한 병 붓고 오랫동안 푹 졸인 후에 양념하는 반찬을 가르쳐줬는데 집에 와서 실습해보니 아주 깊은 맛이 났어요. 이런 걸 만들어 판다면 즐겁게 일할 수 있을 듯했어요” 그래서 명함을 딱 팠다. 명함에는 카피라이터답게 간명하게 썼다. “요리하는 여자 박난이입니다”

대개 5시쯤부터 손님들이 들어온다. 이 시간은 예전에 주부들의 시간이었다. 종일 공부하거나 일한 몸을 끌고 집으로 돌아올 가족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시간. 그러나 언젠가부터 양상이 달라졌다. 지금은 네 집 중 한 집이 1인 가구인 시대다. 부모와 자식으로 구성된 가정이라 해도 저녁밥을 집에서 먹는 식구 수는 완연히 줄어들었다. 전업주부로 저녁을 짓는 엄마도 눈에 띄게 줄었다. 따라서 집에서 반찬을 만드는 게 도리어 비경제적인 일이 되어 버렸다.
“식구가 많은 집은 반찬가게에 오지 않아요. 집에 많이 먹는 청소년이 있어도 잘 안 와요. 아무래도 비싸게 먹히니까. 손님들의 절반쯤이 혼자 살아요. 나머지 절반은 아직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지 않은 젊은 주부이고. 직장 다니는 젊은 엄마들은 집에서 반찬 만들 시간이 없죠. 나물 종류는 집에서 손질하고 무치기 번거로운 데다가, 시간과 정성 들여 요리해서 다 못 먹고 버리는 걸 감안하면 손수 해먹는 돈이 더 많이 들거든요.”
저녁이 되면 고3 작은아들이 밥 먹으러 엄마 가게에 잠깐 들른다. 아들에게 전보다 훨씬 더 풍성한 밥상을 때맞춰 차려줄 수 있는 직업이라 기쁘다. 큰아들은 독일 드레스덴 대학에서 그림을 공부한다. 조그만 심야식당을 꿈꾸며 추상적인 언어를 다루는 작업을 버리고 구체적인 먹거리를 다루는 작업을 택해 제 2의 인생을 사는 그녀의 카카오톡에는 “아주 오래된 새 길을 만나는 일”이라는 메시지가 떠 있다, 반찬을 만드는 일을 의미한다. 그녀가 시작한 일은 오래 전부터 한국 사람들이 먹어온 밥과 반찬을 새롭게 만나는 일이었다. 그녀는 어머니 요리 솜씨를 물려받았다. DNA에 각인된 맛을 잘 아는 혀와 코, 그리고 단련된 손이 있기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하다 보니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하는 일의 가치도 알게 됐다.

“시장에서 저울을 정확히 주는 할머니들의 심정을 알게 됐어요. 사람마다 1그램을 더 얹어주다가 그게 종일 쌓이면 양이 얼마나 커지겠어요. 돈도 그래요. 전에는 푼돈을 아낄 줄 몰랐죠. 그게 쌓이면 큰 돈이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이제 비로소 깨달았어요.”
작은 계획이 있다면 자그만 심야식당을 운영하는 것이다. 심신이 허하고 쓸쓸한 이들을 위하여 따뜻한 밥을 파는 집, 밤늦게 적적하게 홀로 밥 먹는 이들을 위해 안온한 불빛을 밤늦게까지 밝혀두는 집, 그런 공간을 마련하고 싶다.
현재 소소한 반찬의 사업성은? 매출은 쏠쏠하다. “하루 30~40만원어치 정도는 팔리고 재고도 거의 없어요. 큰 돈을 벌지야 못하지만 자영업이 힘들다고 아우성치는 시대에 그게 어디예요? ”

김서령(Kim Seo-ryung 金瑞鈴)오래된 이야기 연구소(Old & Deep Story Lab) 대표

전체메뉴

전체메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