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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SPRING

LIFE

ON THE ROAD 함양 산청: 봄 산 냄새 가득한 옛 선비들의 마을

둘레길이 이어주는 지리산 권역의 여러 군 중 함양과 산청이 있다. 산이 오라 하고 들이 머물라 하는 아늑하고도 매혹적인 여행지이다. 걷다 보면 봄 냄새에 옛 선비의 향기가 아련히 떠돈다.

살아오는 동안 내가 좋아한 두 가지 냄새가 있다. 엄마의 젖 냄새와 이른 봄의 산 냄새가 그것이다.
엄마의 젖 냄새는 사실 기억에 없다. 60년이 지난 일이어서 기억에 남아 있지 않으니 내게 이 냄새는 관념이다. 그래도 살아오는 동안 보아 온 가장 아름다운 풍경 중의 하나는 엄마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모습이다. 나는 여섯 번쯤 히말라야 트레킹을 했는데 설산의 신비한 파노라마보다도 내 마음을 훔친 것은 고산 마을의 여인들이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외지인의 시선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면 환하게 웃으며 “나마스떼!” 하고 인사를 했다. 모성의 감정으로 타인을 바라보는 탓이다. 지금 엄마는 세상에 없다. 꿈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지리산의 추억
남원에서 지리산 정령치 고개를 넘어 운봉으로 가는 동안 내내 산 냄새를 맡았다. 차창으로 스며드는 이른 봄의 산 냄새를 나는 좋아한다. 오래된 서고에 꽂힌 책 냄새 같기도 하고 밤을 새워 쓴 시의 초고에서 나는 냄새 같기도 하다. 기차역 플랫폼의 낡은 나무 의자, 장도열차의 기적소리, 서서 컵라면을 먹는 사람들의 등허리에까지 묻어 있는 초봄의 산 냄새는 화려하지 않고 고요하다. 산은 내 꿈을 읽어줘, 라고 말하는 법도 없다. 그냥 한 자리에 묵묵히 서서 이제 곧 바뀔 풍경의 다음 장을 기다린다. 세상의 모든 곳을 여행한 이가 지니지 못한 몸 냄새를 이른 봄의 산은 지니고 있다. 그 냄새 속을 차는 고요히 달린다.
오래 전 백무동 골짜기를 거쳐 지리산 트레킹을 한 적이 있다. 동행이 있었다. 삶에는 단순히 행운이라고 치부하기 힘든 운명적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이 그러했다.

그가 왜 지리산 트레킹에 동의했는지 신들만 알 것이다. 산을 오르던 중 한 작은 마을에서 점심을 먹었다. 집주인이 김치를 내주었는데 김치에서 신비한 냄새가 났다. 처음 맡는 냄새였다. 쟈스민 꽃 냄새 같기도 하고 라벤다 향 같기도 했다. 주인이 젠피 냄새라고 했다. 낯선 향신료를 맛 본 순간이었다. 처음 맡는 그 냄새가 좋았다. 지리산 아래에서는 젠피라 부르는 이 풀의 사전 이름은 초피이다. 내가 맛있게 먹는 것을 본 주인이 한 마디 곁들였다. “날이 풀렸다고 해도 정상에 오르면 춥다. 그러니 볏짚을 한 단 가지고 가라”고. 그의 집에는 가을에 탈곡하고 남은 볏짚들이 있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었다. 어리숙하게 배낭 위에 볏짚(10kg 이상 되었을 것이다) 한 단을 지고 지리산을 올랐다. 숙영지에 이르러 나는 그의 말대로 바닥에 볏짚을 깔았다. 누워보니 푹신했다. 그 위에 누워 두 장의 담요를 덮으니 텐트 안의 램프 불빛이 따스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텐트 위에 하얗게 서리가 깔려 있었다. 그날 밤 그 텐트 안에서 첫 키스를 하고 내려와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얻게 되었다.

천 년 된 인공 숲
차는 지리산 길을 더듬어 함양(咸陽)에 이른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수도와 같은 이름이다. 구름도 쉬어갈 산골 읍에 왜 이런 이름을 붙였을까? 표의문자인 한자에 그 의미가 들어 있다. 모두가 두루 따뜻한 햇볕 속에 살기를. 내 발걸음은 상림(上林)을 향한다.
상림은 지금부터 1150년 전인 신라 진성여왕 때 문장가 최치원이 만든 숲이다. 한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인공 숲이다. 최치원은 11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가 17살에 과거에 급제하고 28살에 귀국한다. 외직을 자원하여 함양 태수로 부임하였는데 고을 사람들이 수재에 고통 받는 것을 보고 방수림으로 이 숲을 만들었다 한다.

일두 산책로라 이름이 붙은 언덕길을 오르면 마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늙은 소나무 가지 사이로 옛 기와집들의 모습이 정연하다. 마침 개울 주위의 몇몇 집에서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 오른다.

숲의 입구에 아름다운 전설을 지닌 연리목(連理木)이 서 있다. 두 그루가 몸통이 붙어 하나가 된 나무를 연리목이라 하고 가지가 서로 붙은 것을 연리지라 하거니와, 옛날에는 모두 나라에 상서로운 기운이 있을 조짐으로 받아들였다. 이 연리목은 서로 다른 수종인 느티나무와 개서어나무가 몸을 합한 것이어서 보는 이의 눈을 붙든다. 최치원이 상림을 만들 즈음 강 건너편에 사는 한 총각이 함양 성 안의 처녀를 사랑하여 매일 강물을 건너왔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최치원이 이곳에 징검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 그 징검다리는 사라지고 없지만 함양 사람들은 그 강물 위에 천년교란 이름의 다리를 놓았다. 이 나무를 함양 사람들은 사랑나무라 부르고 연인들이 이 나무 아래를 함께 지나가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20만 제곱미터가 넘는 면적에 120여 종 20,000여 그루의 활엽수로 이루어진 이 숲은 천연 기념물 154호로 지정되어 있다.

개평 한옥마을의 풍치
조선시대부터 함양 사람들은 “좌 안동 우 함양”이라는 말을 즐겨 썼다. 이는 함양과 안동이 조선 선비의 정신을 대변하는 고을임을 자랑한 것이리라. 앞서 말한 고운 최치원을 비롯하여 점필재 김종직(1431‒1492), 일두 정여창 (1450‒1504), 연암 박지원(1737‒1805) 등 실로 한국인이라면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시대의 향기가 짙게 스미어 있는 선비들이 이곳에 그들의 삶과 학문의 발자취를 남겼다.
지곡면 개평리의 한옥마을에 들어섰다. 작은 다리를 건너 동네로 들어서니 정미소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옛 시골 마을에서 정미소의 규모는 곧 삶의 규모였다. 정미소가 열심히 돌아갈수록 사람들의 삶은 부드럽고 따뜻했을 것이다. 정미소 뒤편의 야산에 늘어선 노송들의 비범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정여창의 고택을 찾았다. 그는 조선 최대의 폭군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의 폐출과 사사(賜死) 사건으로 비롯된 1504년 갑자사화로 부관참시 당한 사림파의 대표 선비였다. 12동으로 이루어진 이 집은 1506년 중종반정으로 정여창이 복권된 뒤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사랑채에 걸린 “백세청풍”이라는 대형 편액이 눈에 들어온다. 대대손손 청백리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조선 선비의 염원이 들어 있다. 당신이 애주가라면 이 집안의 향기가 가득 스민 가양주인 솔송주를 맛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5백 년의 전통을 지닌 이 술은 정여창의 후손들이 최고의 예를 올리기 위해 만든 제사 술에서 유래했다. 봄날 어린 소나무의 새순을 채취해 만든다는 이 술을 맛보고 옛 선비들의 시흥을 한 차례 느끼고 싶었으나 불행히도 홍보관 에서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일두 산책로라 이름이 붙은 언덕길을 오르면 마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늙은 소나무 가지 사이로 옛 기와집들의 모습이 정연하다. 마침 개울 주위의 몇몇 집에서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 오른다. 옛 여행자들은 하룻밤 묵을 숙소를 정할 때 밥 짓는 연기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고 한다. 마을에 꽃이 피고 집집마다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 오르면 아, 오늘밤 여기 묵어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솔송주는 맛보지 못했으나 늙은 소나무 냄새와 밥 짓는 연기를 실컷 맡았으니 송연주(松烟酒)를 들이켰다 할 것이다.

산골 마을들과 절집
차는 산청 대원사 길로 접어든다. 지리산 자락을 흐르는 경호강 주위에는 시천, 찬샘, 덕교, 명상과 같은 아름다운 이름의 산골 마을들이 있다. 어둠이 깔린 강변 마을들의 불빛이 아름답다. 산 위로 올라간 몇몇 집들의 불빛은 반딧불처럼 보인다. 대원사는 지리산에 자리한 사찰 중에서 가장 깊은 계곡 물소리를 지닌 사찰이다. 깊은 산 냄새를 맡으며 시오리 산길을 오르는 내내 물소리가 따라왔다. 산 냄새 속에 별은 초롱초롱하고 저녁 예불을 알리는 절집의 쇠북소리가 들려온다. 어두컴컴한 경내를 걸어 대웅전 앞에 이르니 한 비구니 스님이 합장을 한다. 나도 합장을 하며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늦었습니다. 밤의 대원사에 한 차례 들르고 싶었지요.” 그는 말없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이 절에서 하룻밤 머물며 밤새 계곡 물소리를 듣고 산 냄새를 맡고 싶었다. 꿈은 깨졌지만 사하촌의 민박집에서 산나물 곁들인 저녁을 먹고 하룻밤을 묵을 수 있었다. 강변 마을의 불빛들이 꽃 같았다.

옛 담이 아름다운 마을
1989년 소설가 이명한 선생과 함께 중국의 서역지방을 여행했다. 돈황과 트루판, 우루무치를 차례로 여행했는데 가업으로 한의원을 하는 선생은 내게 서역지방에 동충하초라고 불리는 기가 막힌 약초가 있다고 했다. 여름에는 풀이고 겨울에는 벌레가 된다는 신비한 약초 이야기를 할 때 믿기지 않았는데 유원의 한 약초 가게에서 진짜 동충하초를 만났다. 선생이 두 손으로 동충하초를 받들어 모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선생은 내게 한방 치료의 본질이 향기치료임을 일러 준 분이다. 산약초의 좋은 향기로 몸 속의 나쁜 기운을 몰아낸다는 것이니 동충하초와는 다른 신뢰가 있었다. 산청에는 지리산 자락에서 나는 약초들을 소개하는 한의학박물관과 허준의 동의보감 발간 400 주년을 기념하는 동의보감촌이 있다. 동의보감은 동양의술의 교본과 같은 책으로 중국과 일본에서도 간행된 바 있다.

유네스코의 기록 유산으로 등재된 이 저술은 금속활자와 함께 한국인의 자랑이라 할 것이다.
남사예담촌은 조선 선비 마을의 한 전형을 간직한 곳이다. 옛 담이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마을에 들어서면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길 이라는 이정표가 있고 붉은 흙에 꼼꼼히 돌을 채워 넣은 돌담이 눈에 들어온다. 골목 입구에 선 회화나무 두 그루는 머리 위에서 서로 교차하여 여행자를 맞는다. 300년 이상 된 이 회화나무는 옛 선비들이 이 나무의 푸른 기상을 보며 몸과 마음을 맑게 닦았다고 하여 ‘선비나무’로 불리기도 한다. 풍수상으로 이 마을은 두 마리의 용이 불을 뿜는 형상을 지녔다. 그 불길을 막기 위해 이 나무를 심었다고도 한다.
키보다 훌쩍 높은 담장의 높이가 어떤 여행자에게는 조금 불편할 듯도 하다. 산과 들을 끌어들이는 뜰의 모습이 더 자연스러운 것은 아닐까.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제 1호’라는 칭호 또한 내겐 좀 답답하게 느껴진다. 깊은 학식과 덕망을 지닌 선비라면 이렇게 높은 담을 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는데 담에서 풍겨 나오는 봄 흙 냄새는 우련 좋다.

곽재구 (郭在九, Gwak Jae-gu)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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