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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SPRING

LIFE

TALES OF TWO KOREAS 탈북 화가들이 꿈꾸는 국경 없는 남북

자유에 대한 열망으로, 또는 굶주림에서 벗어나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북한 땅을 벗어나 많은 난관을 뚫고 남한으로 온 2만8000여 명에 달하는 탈북자들 가운데는 화가들도 더러 보인다. 탈북 화가들의 작품에는 떠나온 곳의 잔영(殘影)이 진하게 어른거린다.

대표적인 탈북 화가들의 작품 중에는 얼핏 보면 북한 선전물로 오해하기 십상인 것도 적지 않다. 실제로 탈북 화가 ‘선무’(Sun Mu 線無•44) 씨는 그런 오해를 받아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 2007년 서울 종로구의 한 갤러리에서 열린 첫 번째 전시회 때였다. 느닷없이 한 경찰관이 갤러리에 들어섰다. “잠시 같이 가셔야겠습니다.” 알고 보니 인근 주민과 관람객들이 “북한 찬양 일색의 그림이 전시되고 있다”면서 경찰에 신고했던 것이다. 2008년 부산 비엔날레에 참가했을 때는 김일성 초상화 때문에 작품이 철거되는 수모를 겪었다.
또 다른 탈북화가 송벽(Song Byeok 46) 씨도 흡사한 경험을 했다. 서울 강남구의 한 상가에 있는 화실에 걸린 그림에 김정일, 김정은 초상화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인근 어르신들이 신고해 국가정보원 직원이 다녀갔다.
이들은 이렇듯이 여전히 경계인(境界人)으로 살아가고 있다.

압류된 통일 염원
1998년 북한을 떠나 중국, 태국, 라오스 등 여러 동남아 국가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2002년 남한에 안착한 선무는 ‘탈북 화가 1호’로 불린다. 그러나 체제가 싫어 계획적으로 탈북한 것은 아니다. 어렸을 적에는 소년단으로 활동했으며, 미술대학을 3년 동안 다닌 것이 인연이 돼 군복무 중 선전물 담당 화가로 활동했다.탈북은 우연히 이뤄졌다. 너무나 배가 고파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 잠시 나와 온갖 일로 돈벌이를 하고 있던 도중에 북한 선거철이 다가왔다. 모든 인민이 참여해야만 하는 강제선거여서 행여 기권이라도 하면 정치범으로 몰려 수용소로 가야 하는데, 북•중 국경과 거리가 먼 고향 황해도까지 당장 돌아갈 방법이 막막해 아예 북한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중국에서 접하게 된 남한 생활상에 마음이 흔들린 것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서울에 온 뒤 홍익대 미대에 입학해 대학원까지 마치고 전업 작가가 됐다. 휴전선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선무’라는 예명에는 ‘경계가 없다’는 포괄적인 의미도 담겨 있다. 그는 북한에 남아 있는 부모와 형제들에게 피해를 줄까 봐 걱정돼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지 않고 산다. 언제 어디를 가든 모자와 선글라스를 필수품으로 챙긴다.
팝아티스트 선무의 작품을 관류하는 가장 큰 특징은 북한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풍자다. 비판은 반어법으로 나타난다. <아디다스 입은 김정일>, <조선의 예수> 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그의 작품에 대한 세상의 관심도 온통 북한에 대한 풍자와 역설에 초점이 맞춰지는 듯하다. 그는 그 동안 미국 뉴욕에서 두 번, 독일 베를린에서 두 번, 이스라엘 예루살렘, 노르웨이 오슬로, 호주 멜버른에서 각각 한 번씩 개인전을 열었다. 2016년에는 프랑스에서 그룹전을 열 계획이다. 서방 언론은 그에게 ‘얼굴 없는 화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2014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려던 개인전 실패 경험은 마냥 불안한 그의 신변과 남북한 대립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개관하는 날 중국 공안요원들이 전시관 입구를 봉쇄하여 개막식은 열리지 못했다. 대형 플래카드와 전시작품도 철거당했다. 그때 압류된 그림은 아직도 베이징에 남아 있다. 그는 붉은색, 흰색, 푸른색 등 북핵 문제 6자회담 참가국들의 국기에 포함된 색을 주제로 한 이 전시회에서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은 작품들을 선보일 계획이었다.
당시 그는 다시 북한으로 송환되는 게 아닌가 싶어 가슴을 졸여야 했다. “아내와 두 딸을 두고 잡혀갈까 봐 정말 두려웠습니다.” 그는 지금 중국에서 처음 만난 중국동포 출신 아내와 행복감을 느끼며 살고 있다. 다큐멘터리 <나는 선무다> 선무 작가의 최근 그림에는 남북한의 모습이나 사람, 풍물이 한 화폭에 나란히 등장하는 사례가 많다. 평화•화합•공존을 염원하는 그의 일관된 마음이 담겼다. 그의 작품은 사회주의 프로파간다 예술을 패러디한 팝아트가 많지만, 정치적 목적을 최대한 배제한 채 예술이 가진 보편성을 토대로 분단의 특수성과 북한의 현실을 바라보려 한다.

북한에서 이데올로기의 도구가 됐던 게 가슴 아팠던 만큼 또 다른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아서다.
선무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자본주의적 접근이 아닌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두 체제가 지닌 이데올로기의 혼란을 겪으면서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화폭에 옮겼기 때문이다. 그는 남한 생활 14년째를 맞지만, 아직도 적응이 쉽지 않다. ‘눈 감으면 북쪽, 눈 뜨면 남쪽’일 때가 많다.
2015년 9월 제7회 DMZ국제다큐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나는 선무다’( I Am Sun Mu)>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는 그를 한눈에 어림할 수 있게 해준다. 미국의 애덤 쇼버그(30) 감독이 그의 인생과 작품세계를 조명한 87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는 매우 상징적이다.
경계인인 그의 꿈은 늘 열린 세계로 향해 있다. “뉴욕에 갔을 때 이 세상은 남북한뿐만 아니라 중동, 아프리카, 중남미, 유럽 여러 나라들이 존재한다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삶에 대한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름처럼 그의 예술철학 역시 ‘경계 없음’에 방점이 찍혀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북한 개방을 촉구하는 <벗어라>
송벽 씨도 팝아티스트에 속하며 작품 내용이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과 풍자라는 점에서는 선무 화가와 공통점을 보인다. 공교롭게도 그의 고향도 선무와 같은 황해도다. 송벽이라는 이름 역시 예명이다. 그는 선무와 달리 얼굴을 드러내고 당당하게 활동을 한다. 그는 “팝아트 식으로 재미있게 그리되 철학적 에세이를 해학적 표현으로 담는다”고 자신의 화풍을 설명한다.
배우 마릴린 먼로가 지하철 환풍구 위에서 바람에 날리는 스커트를 붙잡는 유명한 장면이 담긴 영화 <7년만의 외출> 포스터에서 얼굴만 김정일로 바꿔 북한사회를 감추려는 것을 패러디한 그림은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이 작품 제목 <벗어라>에는 북한의 개방을 촉구하는 메시지가 담겼다.
그의 작품에는 비둘기와 나비도 자주 등장한다. “북한 인민들 마음 한구석에는 자유를 꿈꾸는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비둘기와 나비가 많이 포함됐습니다.”
북한에서 7년 간 선전포스터를 그렸던 송벽이 탈북한 동기는 자유보다 배고픔에서 벗어나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2000년 8월 첫 탈북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함께 나섰던 아버지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두만강 급류에 휩쓸려 익사하고 자신은 경비대에 붙잡혔다. 수용소에서 강제노동을 하다 화가에게 생명 같은 오른손 검지 한마디를 잃었다. 그는 풀려난 뒤 2001년에 다시 탈출을 기도해 중국을 거쳐 2002년 남한에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2005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이 들려왔다. 2년 후 그는 막내 여동생을 탈북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2007년 공주사범대 미술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홍익대 대학원에 진학해 동양화를 전공했다. 그러는 동안 생계를 위해 막일꾼으로 나서고 이삿짐센터에서도 일했다.
2011년 ‘영원한 탈출, 영원한 자유’라는 제목으로 서울 인사동에서 첫 개인전을 연데 이어, 지금까지 워싱턴과 애틀랜타 등 미국에서만 세 번 전시회를 열었다. 2012년 워싱턴에서 연 전시회는 로버트 킹 북한인권특사,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미국대사 같은 주요 인사들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CNN, BBC, NHK 등 해외의 주요 언론도 큰 관심을 드러냈다. 언론보도로 유명해진 그는 미국에서 여러 대학의 요청으로 강연도 했다.

송 작가는 2015년 10월 독일 통일 25주년 축하 행사 기간에 <김정은과 마릴린 먼로> 등의 작품으로 프랑크푸르트 초대전을 개최했다. 2016년 9월에는 과거 동서독 국경 부근에서 전시회를 열 계획도 잡혀 있다.
그는 한국 미술이 충격적으로 다가와 한동안 큰 거부감을 가졌다. 추상화를 보고 ‘어떻게 저런 것이 작품이 될까’ ‘이상한 그림이 왜 저렇게 비싼가’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는 북한 전문 작가로 머물고 싶지는 않다. 북한 인민뿐 아니라 굶주림과 압제에 시달리는 전 세계인들에게 평화 희망을 주고 그들의 꿈을 키워주는 화가가 되고 싶다. 그의 화실 책상 앞에 써 붙여 놓은 ‘현실에 예속되지 말고 세상을 향한 도전, 꾸준히 멈추지 말고 지그시 한길을 가라’는 글귀가 눈길을 끈다. 독신으로 사는 그는 그림을 그리다 보면 이따금 밥을 먹는 시간도 잊어버린다.

팝아티스트 선무 씨는 두 체제 사이에서 이데올로기의 혼란을 겪으면서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화폭에 옮겼다. 그는 남한 생활 14년째를 맞지만, 아직도 적응이 쉽지 않다. ‘눈 감으면 북쪽, 눈 뜨면 남쪽’일 때가 많다.

첫 번째이자 마지막이었던 전시회
탈북 화가 중 가장 연장자였던 강진명 작가는 병마의 불운에 울어야 했다. 1999년 북한을 탈출해 10년 만에 한국에 왔지만 이미 건강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상태였다. 그 역시 북한에서 선전화를 그리다가 중국 칭다오로 탈출해 조선족으로 위장한 뒤 한국인이 운영하는 액세서리 공장에서 일했다. 평양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인민무력부 현역 창작가와 대학 교원(교수)으로 활동하던 엘리트 화가였다.
그는 2010년 2월 남북한의 자연을 담은 70여점의 그림으로 첫 개인전을 서울 인사동에서 열었으나, 그 다음 달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요즘으로선 젊은 57세였다. 그는 항암제 치료를 받으면서도 전시를 위해 밤낮으로 작품 활동에 매달렸다. 그는 “통일이 될 때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작품 활동에 전념하고 싶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며 늘 안타까워했다.
그는 생전에 이렇게 털어놓곤 했다. “제가 창작활동을 시작했던 1970~80년대에는 북한이 경제도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대우도 괜찮았고 살아가는데 힘들지 않았어요. 하지만 자유가 없었어요. 예술가에게 창작의 자유가 전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죠.”
첫 번째이자 마지막이었던 전시회의 주제도 ‘꿈에 그리던 자유를 찾아’였다. <자유의 파도>라는 유화 작품은 그가 자유를 얼마나 갈망했는지 절절함이 묻어났다.
북의 보복이 두려워 한동안 본명 대신 ‘강호’라는 가명을 써야 했던 그는 남한에서 주로 남북한의 유명 산을 주제로 산수화를 그렸다. 그의 지론에는 국경 없는 남북에 대한 희원(希願)이 짙게 깔려 있다. “사상과 이념을 초월해 남북이 하나가 될 수 있는 분야는 문화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을 통해 남북이 공통점을 찾아 접근해 나간다면 평화통일의 그날을 좀 더 앞당길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김학순(Kim Hak-soon, 金學淳) 언론인, 고려대학교 미디어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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