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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AUTUMN

한글, 글로벌 스포트라이트 속으로

영화가 그린 한글의 역사

<나랏말싸미>는 15세기 조선 시대에 한글을 만들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고, <말모이>는 20세기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일제가 말살하려던 한국어와 한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을 다룬 영화다. 한국 영화에 매료되어 서울로 유학 온 전 아사히신문 기자 나리카와 아야가 두 편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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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철현(Cho Chul-hyun 曺喆鉉) 감독의 2019년 개봉작 <나랏말싸미(The King’s Letters)>에서 세종이 신미 스님으로부터 표음문자인 산스크리트어는 소리를 문자로 표현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는 장면이다. 한글 창제 과정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 흥미를 끌었다.

나는 가끔 한국 학생들에게 강연할 기회가 있는데, “히라가나나 가타가나는 언제 만들어졌어요?”라는 질문을 받고 당황한 적이 있다. 히라가나도, 가타가나도 한자로부터 파생된 글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변화를 거쳐 만들어졌기 때문에 창제 시기를 언제라고 못박기 어렵다. 반면에 한글은 창제와 반포에 관한 확실한 기록이 있는 전 세계 유일의 문자다.

일본에서는 히라가나나 가타가나와 함께 한자도 쓰고 있다. 대다수 일본인들은 한자가 중국에서 들어온 문자라는 건 알지만, 한자도 일본어의 일부라고 인식한다. 따라서 한자에 비해 히라가나나 가타가나에 특별히 애착을 가지는 일본인들은 별로 없다.

조철현(Cho Chul-hyun 曺喆鉉) 감독의 2019년 개봉작 <나랏말싸미(The King's Letters)>는 한글 창제 과정에 대한 영화다. 도입부에 “이 영화는 훈민정음의 다양한 창제설 가운데 하나를 영화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라는 자막이 나온다. 이 설명처럼 영화는 세종대왕과 신미(信眉) 스님이 주축이 되어 한글을 만들어 가는 이야기를 풀어내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영화적 허구다. 하지만 영화에서도 강조되는 것처럼 세종대왕이 백성을 위해 한글을 만들었다는 창제 목적은 사실이다.

영화 속에 상징적인 대사가 나온다. 한글을 만들기 전 세종대왕은 한자로 쓰인 책들을 버리면서 “다 쓸모없는 종잇조각일 뿐”이라고 하거나 “내가 아무리 많은 책을 만들어도 백성들에게 전달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렇듯 한글과 한자 사이에는 사회적 신분과 계급이라는 간극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 뒤에는 중국이란 대국이 있었다. 그는 “나는 중국을 능가하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면서 그것은 바로 “모든 백성들이 문자를 읽고 쓰는 나라”라고 말한다.

“복숭아 속의 씨가 몇 개인지는 누구나 알지만, 그 씨에 복숭아가 몇 개 들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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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 스님이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과 셋째 아들 안평대군에게 산스크리트어의 특징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장면이다. 영화 속에서 두 아들이 세종과 함께 은밀히 한글 창제를 추진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실제로 수양대군은 불경 언해서 『석보상절』을 지었다.

왕의 선물
이 영화가 강조하는 또 다른 점은 한글이 소리를 표기할 수 있는 문자라는 것이다. 신미 스님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를 그대로 문자로 표현할 수 있을지 깊이 고민하며 수많은 시도를 한다. 이들이 그토록 표음 문자에 매달린 것은 표의 문자인 한자로는 조선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를 제대로 담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헌왕후(1395~1446)의 존재도 인상적이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한국 속담처럼 일반적으로 한국 여성들은 어린 시절부터 남성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으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 부덕한 것으로 여기며 살았다. 그러나 소헌왕후는 영화 속에서 “암탉이 울어야 집안이 흥하고 나라도 번성하리라 믿는다”고 말한다. 여성이 문자를 배우고 힘을 발휘해야 가정도 나라도 번성한다는 뜻이다. 궁녀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장면도 있다. 사회적 약자인 백성과 여성에게 힘을 실어 주는 문자가 한글이었던 것이다.

한글을 만든 다음에도 세종대왕의 고민은 계속된다. 한자를 중요시하고 새로운 문자를 거부하는 신하들 때문이다. 특히 그들은 불교를 배척했기에 신미 스님이 한글 창제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새 글자의 반포를 더욱 격하게 반대한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뜻을 굽히지 않은 채 신하들에게 간절히 부탁하며 훈민정음으로 제작된 책을 배포한다.

영화에서 신미 스님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의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말한다.

“복숭아 속의 씨가 몇 개인지는 누구나 알지만, 그 씨에 복숭아가 몇 개 들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글의 탄생으로 얼마나 풍요로운 세상이 펼쳐질지 알 수 없다는 뜻인 것 같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글은 세종대왕이 후세에 남겨준 크나큰 선물이라고 느꼈다. 나 또한 그 선물을 받은 사람 중 하나로 종종 한글로 기사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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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를 배경으로 한 엄유나(Eom Yu-na 嚴柔那) 감독의 <말모이(MAL․MO․E: The Secret Mission 義筆容辭)>에서 주인공 조선어학회 회장 류정환(柳正焕, 오른쪽)과 사환 김판수(金判秀)는 일제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한국어 사전 편찬을 추진하며 한반도 전역의 사투리를 수집한다. 류정환은 실제 인물을 모델로 했으나, 김판수는 영화를 위해 설정된 가상 인물이다.
ⓒ 롯데엔터테인먼트(Lotte Entertainment Co., Ltd)

독립운동의 일환
같은 해에 개봉된 엄유나(Eom Yu-na 嚴柔那) 감독의 <말모이(MAL․MO․E: The Secret Mission 義筆容辭)>는 1940년대를 배경으로 한국어와 한글을 말살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제목의 ‘말모이’는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주시경(周時經 1876~1914)과 그 제자들이 1911년 편찬한 최초의 국어사전인데, 편찬자들의 사망과 망명 등으로 출판되지는 못했다. 당시 만들어진 초기 원고는 여러 단체로 인계되었다가 조선어학회를 통해 1942년 초고가 완성됐다. 그러나 인쇄 직전 일제의 탄압으로 원고가 유실되었다가 1945년 해방 직후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되었다. 영화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삼았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 세종대왕이 바랐던 것처럼 과연 한글이 한국 민중에게 널리 전파됐는지 의문이 든다. 주인공 김판수(金判秀)가 한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까막눈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캐릭터에는 글자를 깨우치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보여 주기 위한 영화적 설정이 담겨 있지만, 실제로 이 시기 문맹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또 한 명의 주인공은 조선어학회 회장 류정환(柳正焕)이다. 두 남자의 인연은 김판수가 류정환의 가방을 훔치면서 시작된다. 김판수는 돈이 목적이었지만 사실 가방 속에는 중요한 원고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주시경의 한글 사전 원고였다. 그는 훈민정음에 처음‘한글’이라는 이름을 붙인 인물로 ‘한글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조선어학회는 주시경의 작업을 이어 조선어사전을 만들려고 했는데, 그들에게 한국어와 한글을 지키는 일은 하나의 독립운동이었다.

영화 속에서 조선어학회 회원 구자영(具子英)은 목숨을 걸고 사전을 만드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던 김판수에게 “말과 글이라는 게 민족의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어 ‘우리나라, 우리 딸, 우리 가족’을 서양에서는 ‘나의 나라, 나의 딸, 나의 가족’이라고 말한다며, ‘우리’라는 말에 담긴 공동체 정신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일본어 사용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등장인물들이 한국말 사전을 만드는 일은 상당히 위험했다. 실제로 1942년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관계자들이 검거되어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사건이 있었다. 이런 아픈 역사 때문에 한국인들이 더더욱 한글에서 특별한 민족성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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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한글을 깨친 김판수가 조선어학회가 발간한 잡지 『한글』 표지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보고 있는 장면이다.
ⓒ 롯데엔터테인먼트(Lotte Entertainment Co., Ltd)

나리카와 아야(Aya Narikawa 成川彩)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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