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특집

DMZ: 철책선을 통해 엿본 금지된 땅 기획 특집 4 교동, 혼자서도 마주보는 섬

섬 전체가 민간인출입통제선 안에 있는 교동도에는 군사 분계선이나 비무장지대가 따로 없다. 섬밖에 있는 바다가 이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4년에는 군사안보를 이유로 논란을 빚었던 강화도와의 연륙교가 개통되어 배를 타지 않고도 이 섬에 닿을 수 있다.

맑은 날 경기도 강화군 교동도 화개산 정상에 오르면 북녘 땅 연백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실제로 교동도 사람들은 남북이 분단되기 전까지 나룻배를 이용해 황해도 연백의 오일장을 이용했다고 교동의 몇 안 남은 실향민 노인들은 증언한다.

한국인들이 조강(祖江)이라 부르는, 한강과 임진강 하구의 합수머리에서 강화와 교동을 지나 황해로 이어지는 물길을 정전협정은 ‘한강하구 중립수역’이라 부른다. 이곳은 DMZ와 달리 남북한의 민간 선박 모두에게 평화적인 이용을 허용하고 있지만 양쪽의 정부는 선박의 안전을 이유로 어민들의 조업을 제한하고 있다. 이 물길을 따라 37.5㎞나 되는 교동도 해안선의 3분의 2가 철책으로 둘려있다.
1992년, 행주대교에서 임진각 통일전망대를 잇는 고속화도로인 자유로를 건설하면서 바지선을 이 수역으로 통과하도록 허용한 것은 정규 뉴스에 톱기사로 보도될 만큼 아주 예외적인 조치였다. 교동의 바다가 ‘보는 바다’가 된 것이다. 대신에 붉은 해와 세찬 바람과 뿌연 안개를 거느린 교동의 바다는 이곳에 사는 이들로 하여금 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일어난 모든 일들과 변화에 대해 끊임없이 되새기고 묻게 만든다.

아버지의 교동 바다
나는 인천 출신이다. 어린 시절과 학창시절을 보냈을 뿐 아니라 결혼 후 분가할 때까지 줄곧 교동에서 멀지 않은 이 항구 도시에서 살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고향이 어디냐는 물음에는 즉답을 못하고 얼버무리고 만다. 아버지의 고향은 황해도 연백군 호남면(湖南面) 송야리(松野里)다. 그러니까 인천은 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피난을 내려와 새로 정착한 곳이다. 누구도 강요한 적이 없는 이 난민 의식이 언제부터 내 마음 속에 자리를 잡았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명절이나 집안 대소사 때 일가붙이들이 모여 고향에서처럼 큼직한 송편과 만두(만두 두 개면 만둣국 그릇이 꽉 찬다.)를 빚어 먹으며 늘어놓던 고향 이야기 속에서 저절로 익어갔으리라. 어느 날인가는 무슨 마음에선가 아버지와 머리를 맞대고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그 고향 마을의 지도를 그려본 적도 있다.

대룡시장은 한국전쟁 때 연백에서 피난 온 실향민들이 고향의 연백장을 본떠 만든 골목시장이다. 전쟁 직후에서 시간이 멈춘 듯한 시장 풍경에 향수를 자극하는 벽화들이 어우러져 2014년 7월 교동대교 개통과 함께 외지인의 호기심을 끄는 관광지로 떠올랐다.

10여 년 전에 돌아가신 백부와 지금은 거동이 불편한 구순의 아버지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망향의 설움을 달래는 몇 가지 방식 중에 하나가 날씨 좋은 날을 골라 교동도 북쪽 언덕에서 각산(角山)벌 너머에 있는 고향의 뒷산 소나무를 우두커니 바라보다 오는 것이었다. 교동에서 아버지의 고향인 호남면과의 거리는 2-3㎞에 불과하다. 그런 날이면 아버지는 대취해 돌아와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해방 이전에 교동은 4개의 정기 여객선이 드나들 만큼 중요한 기항지였다. 해안에는 10여개의 포구와 나루가 있었으니 그곳으로 들고나는 크고 작은 배들과 그들이 내는 삶의 소리를 떠올리면 왠지 마음이 느긋해진다. 게다가 사리 때 물이 빠지면 연백 땅으로 걸어서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간만의 차가 컸다. 걸어서 연안 읍내 장 구경 갔다가 물때를 놓쳐 이튿날 물이 빠진 뒤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교동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흔한 에피소드였다. 가뭄이 들어 농사가 안된 해에는 연안읍장에 감 같은 교동 특산물을 내다 팔기도 했고, 아예 일거리를 찾아 연백으로 나가는 젊은이들도 많았다. 교동의 섬 처녀가 대처인 연안 총각에게 시집가는 일은 이웃들이 샘낼 만한 혼사였다.
자연히 사는 방식도 황해도 내륙과 같다. 이곳 토박이들의 말투나 어법은 오래 못 본 친척들의 얼굴이 저절로 떠오를 만큼 영락없는 황해도 식이다. 떡과 만두도 큼직하고, 집도 방이 크고 칸 수가 많은 북방계통의 특징을 보인다. 추석이나 정월 대보름에 집집이 돌아다니며 노는 농악은 남쪽 지방보다 가락이 빠르고 힘차다. 큼직하게 썬 순무로 담근 김치며, 고수를 즐겨 먹는 문화 역시 북방식이다.

한국전쟁 때 연백에서 피난해온 지광식 씨(75 세)는 20대 초반에 이발사를 직업으로 택했고 1970년대 말에 교동이발관을 인수하여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일찍 손님이 끊겨도 “해가 질 때까지”라는 영업 시간의 원칙을 어기는 일이 없다.

앞마당 같은 바다
교동도의 어업은 1955년 어로한계선이 설정되면서 섬의 남단에 있는 읍내리 남산포항 선착장에서 강화도 창후리와 석모도 사이로 제한되었다. 이로써 교동팔경 중에 어선들이 연출하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 셋과 함께 파시가 서던 죽산포와 빈장포의 술집과 색주가도 사라졌다. 교동의 어장은 남산포에서 배로 5분에서10분 사이면 경계에 이를 만큼 좁다. 그물 수효도 두 대로 제한되어 있다. 이 작은 바다에서 10가구 안쪽의 어가들이 살아왔는데 지금은 다섯 명의 어부가 간신히 교동 어업의 명맥을 이으며 ‘옛날 그 맛’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추억을 달래주고 있는 형편이다. 한때는 부대장들이 설이나 추석을 앞두고 군인들의 보호 아래 민통선을 개방하여 숭어나 조개류 따위를 잡게 하는 호의를 베풀기도 했는데 이마저도 다 옛 이야기다.
교동 어업의 올해 전반기 수확도 그만그만하다.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나 한국전쟁 때 포대기에 싸여 피난을 나왔을 때 고기잡이로 평생을 살 줄은 누구도 몰랐을 차광식 씨(67세)의 올해 육젓용 새우잡이도 평년 수준으로 단골손님들의 차지가 될 것이다. 어촌계장을 맡고 있는 현상록 씨(63세)는 직접 잡은 수산물로 직거래 장터와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휴전이 된 이듬해 피난민의 아들로 태어나 그 역시 남산포에서 40년이 넘게 바다에 기대어 살고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중립 수역을 헤엄쳐 건너오는 북한 주민 때문에 한바탕 소란을 떠는 일 말고는 교동의 바다에서는 60여 년간 단 한 차례의 군사적 충돌이 없었다는 점이다. 거두절미하고 바다와 더불어 늙어가는 이들의 때로는 모험적이면서도 고분고분하고, 때로는 현실적이면서도 느슨한 삶에 경의를 표한다.

교동 지킴이
대대로 교동에서 살아 온 집안의 한기출 씨(67세)는 약 4만㎡가 넘는 전답을 가진 자수성가한 농업 경영인임을 숨기지 않는다. 섬에서 웬 땅 자랑인가 싶지만 교동에서는 다른 경제 활동보다 농업을 더 쳐준다. 말이 섬이지 바다를 빼앗겨 섬 노릇을 제대로 못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대규모 저수지를 만들고, 경지정리를 하면서 농사 일이 수월해지고 생산성이 높아지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의 얘기다. 방조제를 만든 뒤 갯벌을 농토로 바꿔 교동도의 절대 농지가 늘어난 탓도 크다. 이런 혁명적인 농업의 변화에 그 또한 젊음을 바쳤다.

마땅히 그는 다양한 직책을 가진 지역 유지로 대접받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아끼는 자리는 교동역사문화발전협의회 회장 직함이다. 언제부턴가 교동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고 보전하는 일은 대부분 그의 손을 거친다. 조만간 이 단체의 이름으로 <교동지>라는 향토지도 출간할 예정이다. 그가 이런 변신을 하게 된 배경에는 개발이라는 것이 자연을 파괴하고 역사를 묻어버리고 문화를 훼손하는 근거가 되었다는 아픈 자각이 있다. 교동의 역사와 문화를 말할 때 그는 흥분하지 않고 국사 선생처럼 조리 있고 낮은 목소리로 연도까지 줄줄 꿴다. 그의 얘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첫째, 교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소외되었다. 둘째, 그러나 교동은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한 역사와 문화의 고장이다. 셋째, 따라서 이를 지키고 보존해야 하는 것은 이곳에 사는 우리의 책무다.

“교동면민의 날” 기념 체육대회는 2,700명 남짓한 교동도 주민이 모여 화합하는 행사이다.

“교동은 양경인후(兩京咽喉)라고 했거든요. 고려의 수도 개성과 조선의 수도 한양의 목구멍과 같은 곳이라는 거죠. 강화에는 물살이 너무 세서 배를 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세곡선을 비롯해서 개성과 한양으로 가는 모든 해상 물류는 교동에서 검수를 받았고, 외국의 사신들도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개성이나 한양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지요. 게다가 한강과 예성강으로 들어가는 바다의 초입이라 수도권 해양 방어 사령부 격인 경기수영과 삼도수군통어영이 있던 군사적 중요성이 매우 큰 요충지였습니다. 지금은 교동이 강화에 속해 있지만 말이죠.”
그렇다고 그를 애향심이 그대로 신념이 되어버린 사람으로 여겨선 안 된다. 교동에다 이백만 평의 공업단지를 조성해 남북 교류 사업을 하자는 지자체의 제안이 나왔을 때 그는 “경제적 이득에 중심을 둔 경제특구가 아니라 역사나 문화를 서로 공유하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남북 교류의 장이 진정한 교류다”라고 주장했으며, 차선으로 “기후와 토질이 비슷한 교동을 북쪽과 교류할 농업 전진 기지로 만들어 교동의 문화와 특성을 살리고 주민들이 생업을 지키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자”는 제안을 한 바 있다.

아버지가 고향땅 연백에 대한 그리움과 망향의 설움을 달래는 몇 가지 방식 중에 하나가 날씨 좋은 날을 골라 교동도 북쪽 언덕에서 각산(角山)벌 너머에 있는 고향의 뒷산 소나무를 우두커니 바라보다 오는 것이었다. 교동에서 아버지의 고향인 호남면과의 거리는 2-3㎞에 불과하다. 그런 날이면 아버지는 대취해 돌아와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조선시대에 외침을 막기 위해 쌓은 교동읍성의 자취가 남아 있는 읍내리는 역사 깊은 교동의 중심지였으나 한국전쟁 이후 섬 간척 사업으로 그 위치를 잃었다.

대룡시장과 유격대
대룡시장은 한국전쟁 때 연백이나 개성에서 피난 나온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만들어진 시장이다. 교동을 피난 루트로 삼은 것은 육로보다는 해로가 훨씬 안전하고 빨랐기 때문이다. 특히 중공군의 참전으로 연합군이 퇴각하던 1950년 12월부터 수만 명의 피난민들이 배를 타고 교동과 강화를 거쳐 인천이나 충청도로 피신했다. 그 와중에 연백에서 건너온 많은 젊은이들이 교동에 눌러 앉았다. 이들이 교동에 남은 것은 수복이 되면 가장 먼저 고향 땅을 밟으리라는 기대도 있었지만, 아직 피난을 나오지 못한 가족들의 소식도 듣고, 또 그들을 데리고 나올 요량에서였다. 이들은 당장의 생계를 위해 길가에 포목점이며, 고무신 가게, 옷가게, 국밥집, 술집, 냉면집을 내고 살았는데 그것이 굳어져 지금과 같은 시장이 된 것이다.
지광식 씨(75 세)도 먼저 피신해 자리를 잡은 아버지를 찾아 온 식구가 교동으로 건너왔다. 그는 20대 초반에 당시 인기가 좋았던 이발사를 직업으로 택해 이곳에 이발관을 차려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그 사이 사람이 몰리고 시장이 커지면서 학교와 지서, 면사무소가 주변으로 옮겨와 대룡시장은 어느새 교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다만 땅과 건물의 소유주가 달라 서로의 이해관계가 상충하면서 재개발 계획에서 번번이 제외된 탓에 지금은 1960년대의 시장 풍경을 그대로 지닌 ‘시간이 멈춘 곳’으로 실향의 이미지와 함께 외지인의 호기심을 끄는 관광지가 되었다.
1986년 연백군민회에서 발간한 <연백군지>에는 연백군의 청년 학생들과 낙오병, 전직 경찰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일명 ‘타이거 부대’가 유엔군에 편입되어 교동을 중심으로 유격 활동을 했다고 기록했다. 이들은 휴전이 될 때까지 2년 6개월 동안 2746명의 적을 사살하고 8만 명이 넘는 양민을 구출했다고 한다.

교동도에는 이들을 기리는 ‘유격군 충혼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이들에 의해 좌익으로 분류된 월북자 가족과 부역자들을 색출해 학살했다는 기록은 누락시켰다.
이 전쟁이 가져온 상처는 한반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치유되지 않은 채 그대로 덮였다. 상처는 더디지만 조금씩 아물어가고 있다. 최근 한국을 찾는 외국 방문객 중 1위는 한때 적대국으로 싸웠던 중국인 관광객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 두려움을 이겨낸 사람들의 입에서 반공을 이념으로 적과 싸우던 어두운 시절의 과거가 여러 증언과 기록으로 남겨지고 있다. 2005년 설립되어 2010년에 활동을 종료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9년 교동 주둔 유엔군 유격대(UN Partisan Forces Korea)에 의해 부역혐의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183명의 민간인이 억울하게 학살되었다고 규명했다. 묻히고 내면화된 냉전 시대의 역사가 우리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1975년에 교동면민의 단합을 위해 제정된 ‘교동면민의 날’이 올해로 41회를 맞았다. 올해는 기념 체육 대회도 성대하게 치렀다. 시민이 승자인 전쟁은 없다. 이것이 언젠가 교동과 연백을 잇는 다리가 놓아질 날을 기대하는 한국인들이 교동을 사유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바다를 빼앗긴 교동도 주민들에게 농업은 중요한 생업이다.

이창기 (Lee Chang-guy, 李昌起)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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